1930년대 발견…번번이 실패

친수성 물질과 결합해 약제화

“재관류손상 치료제 내놓을 것”

김명립 빌릭스 대표

사람에게 황달을 유발하는 ‘빌리루빈’이 항염증 물질로 각광받은 건 1930년대부터다.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가 황달에 걸리자 류머티즘 염증이 사라지는 현상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필립 헨치 미국 메이요클리닉 교수가 발견하면서다. 빌리루빈을 약제화하려는 시도가 잇따랐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물에 녹지 않는 빌리루빈의 특성 때문이었다.

반전 드라마를 쓴 것은 국내 바이오업체 빌릭스다. 빌리루빈을 물에 녹게 해 약물질화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김명립 빌릭스 대표(사진)는 16일 “올해 임상 전단계인 비임상을 시작해 이르면 2025년 세계 최초 빌리루빈을 활용한 신약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빌릭스는 폴리에틸렌 글리콜(PEG)과 빌리루빈을 결합해 ‘약제화의 길’을 열었다. 친수성 고분자 물질인 PEG를 결합한 ‘페길화(PEGylation)된 빌리루빈’은 물에 쉽게 녹는다. 몸 안에서 녹아 장기 등에 흡수될 수 있다는 의미다.

빌릭스가 첫 타깃으로 삼은 질환은 장기이식 심근경색 관상동맥우회술 뇌졸중 등에서 발생하는 허혈성 재관류 손상이다. 심근경색의 경우 환자가 스텐트 시술을 받은 뒤 생긴다. 막힌 혈관을 가는 철망으로 뚫으면 멈췄던 심장에 다량의 혈액이 공급된다. 이렇게 되면 활성산소가 갑자기 많아지면서 심장근육이 손상된다. 항산화 효과를 지닌 빌리루빈은 활성산소를 제거해 심장근육의 손상을 최소화한다.

허혈성 재관류 손상은 장기이식을 할 때 보편적으로 발생한다. 생체이식을 할 땐 이 같은 문제가 덜하지만, 뇌사자 이식은 장기를 운송하는 시간 때문에 활성산소로 인한 조직 손상과 염증이 생기기 쉽다. 김 대표는 “미국에선 장기이식이 활성화돼 있지만 아직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만한 치료제가 없다”며 “시장 수요가 풍부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간세포성장인자수용체(c-MET)를 활용해 이 시장을 노렸던 미국 엔지온바이오메디카가 작년 말 임상 3상에서 유효성 입증에 실패한 것도 빌릭스엔 호재다.

김 대표는 “미국 내 신장이식 환자는 연간 2만2000명에 이르는데 이식 때 발생하는 허혈성 재관류 손상 치료제 시장은 연간 7000억원 규모”라며 “다른 장기이식 분야로 넓히면 시장 규모는 수조원에 달할 수 있다”고 했다.

빌릭스는 내년 본격 임상에 나설 계획이다. 김 대표는 “내년 초 임상 1상, 2024년 임상 2상을 거쳐 이르면 2025년 조건부 허가를 받아 시장에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약물전달시스템(DDS)으로 활용될 가능성도 있다. 빌리루빈은 PEG와 결합하면 가운데가 비어 있는 동그란 공 모양으로 변한다. 그 내부에 항암제를 넣어 인체에 주입할 수 있다. 빌릭스는 난치성 암 치료제 개발업체 홀로스메딕과 손잡고 난소암 등 18개 암종에 대한 치료제 후보물질 발굴에 속도를 낼 계획이다.

빌릭스는 최근 국가신약개발사업단으로부터 20억원 규모의 비임상과제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한미약품, 레고켐바이오, 제일약품, 펩트론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난해 말에는 애초 계획보다 35억원 더 많은 175억원의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이선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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